감각을 열어 취향을 수집하는 일
2026년이 되면서, 지인들과의 대화에서 빠지지 않는 주제는 단연 AI다. 이제 디자인 인터뷰에서는 “AI 툴을 디자인 프로세스에 어떻게 적용하고 있나요?”라는 질문이 기본이 되었고, 어떤 도구를 다룰 수 있는지를 묻는 일도 자연스러워졌다. 흥미로운 건, 이 이야기가 꼭 업계 안에서만 오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버 기사와의 짧은 대화 속에서도, 에스테틱 클리닉에서의 스몰토크 속에서도, AI는 별다른 예고 없이 스며든다. 모임과 강연, 스터디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화는 늘 비슷한 방향으로 흐른다. 어떤 도구를 써야 하는지, 업무의 어느 부분에 어떻게 써야 하는지, 그리고 이 변화 속에서 우리는 어디쯤에 서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들.
테크 업계에서는 디자이너와 프론트엔드 엔지니어 사이의 경계가 점차 희미해지고, ‘빌더 (Builder)’라는 새로운 역할이 등장하고 있다. 나 역시 VLM(Vision-Language Model) 관련 일을 하며, 디자이너라는 이름으로 이 흐름 위에 올라탄 사람들 중 하나로서, 더 이상 ‘디자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자주 실감하게 된다.
AI 트렌드를 열심히 따라잡고, 바이브 코딩으로 디자인, 프로토타이핑, 그리고 개발을 하며, 업무의 속도를 높이는 것. 이제 이 모든 것은 디자이너에게 점점 더 필수적인 역량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한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주식 시장에 비유하자면, 호재로 급등하는 종목에 올라타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단기적인 상승이 아니라, 흐름과 패턴을 읽는 일에 더 가깝지 않을까. 무엇이 본질적인 변화인지, 그리고 그 변화가 어디까지 이어질지를 가늠하는 시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JOH의 대표이자 <매거진 B>의 발행인으로 잘 알려진 조수용 대표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이혜성의 1% 북클럽>에 출연해 브랜드와 취향, 일하는 방식, 그리고 AI 시대에 대한 생각을 풀어낸 영상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그의 AI에 대한 관점이 오래 남았다.
이혜성은 인터뷰에서, 생성형 AI가 효율을 극대화하는 도구가 된 지금,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28:55). 이에 대해 조수용은 하나의 흥미로운 가설을 이야기한다. AI로 만들어진 음악이 아무 정보 없이 들었을 때는 좋게 느껴졌지만, 그것이 AI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감정이 달라진다는 것. 반대로, 그 결과물을 만든 사람이 어떤 생각과 과정을 거쳤는지를 알게 되면 다시 호감이 생긴다는 점을 짚는다. 그는 이 사례를 통해,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와 ‘무엇을 좋아하는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말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왜 이걸 만들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은 결과보다, 그 안에 담긴 맥락을 더 오래 기억하게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취향은 인류에게 남겨진 마지막 보물 같은 것이다.”
그의 말은 단순히 감성적인 선언이라기보다, 지금의 변화를 바라보는 하나의 기준처럼 느껴졌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 대상을 ‘아는 과정’을 전제로 한다. 더 많이 알고, 더 오래 들여다볼수록 취향은 서서히 형태를 갖춘다. 그러나 AI는 이 과정을 생략하게 만든다. 알지 않아도 추천을 받을 수 있고, 고민하지 않아도 선택할 수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결정을 위임하게 되고, 그만큼 스스로 취향을 형성할 기회는 줄어드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이를 단순히 위기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취향을 가진 사람에게 더 많은 기회가 열리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모두가 비슷한 방식으로 선택을 위임하는 순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의 가치가 더욱 선명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이 지점이 특히 인상 깊게 남았다.
조수용 대표를 처음 인식하게 된 것은 <B-Cast>를 통해서였다. 유행을 빠르게 좇기보다, 인간 중심의 사고와 자신만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보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더 가까운 사람. 그의 AI에 대한 관점 역시 그 연장선 위에 놓여 있는 듯하다.
그의 말처럼, 취향은 미래로 갈수록 더욱 중요한 기준이 되어간다. 테크 업계에서 디자이너와 엔지니어의 경계가 흐려지며 ‘빌더(Builder)’가 등장하는 모습은, 영화 촬영 현장에 빗대어 볼 수 있다. 과거에는 슬레이트를 치는 스크립터, 포커스를 잡는 촬영 조수, 조명을 설치하는 기술팀이 각자의 역할을 나누어 수행했다면, 이제 AI는 그 기능적인 보조 역할들을 하나로 묶어버린다. 결국 현장에는 ‘어떤 미장센이 이 서사에 어울리는가’와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를 결정하는 감독의 취향만이 남는다. 컷의 타이밍을 결정하고 특정 장면에 머물기로 선택하는 것, 즉 무엇이 ‘좋은 것’인지 판단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몫인 것이다.
사전적 의미로 취향(趣向)이란 ‘하고 싶은 마음이 향하는 방향’이라고 한다. 그것은 단순한 선호를 넘어, 각자가 축적해온 시간과 경험이 만들어낸 결과에 가깝다. 80억 인구만큼 다양한 80억 개의 취향이 존재하며, 정답이 없는 개인의 영역이다. 게다가 이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조금씩 흐르고 변한다. 어떤 기술도 이 과정을 완전히 대신할 수는 없지 않을까?
경험이 쌓일수록 취향은 조금 더 선명해지고, 단단해진다. 그것이 라이프스타일이든, 독서든, 영화든, 여행이든, 혹은 일상의 작은 선택들이든. 중요한 것은 스스로 경험하고, 그 과정을 통과하는 일이다. 나의 경우에는 인상 깊었던 모든 것들을 빼곡히 기록하고, 그때의 감정과 생각을 다시 꺼내보는 방식으로 나름의 기준을 쌓아가고 있다. 예를 들어, Notion에는 ‘공명 💌’이라는 페이지를 만들어두고, 몇년째 그 기록을 이어오고 있다. 세어보니 어느덧 400개가 넘는 설렘조각들이 쌓였다. 어쩌면 이 기록들은, 시간이 지나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해주는 하나의 언어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Notion ‘공명 💌’ 페이지의 일부분)
(유독 좋아하는 짤. 작은 휴먼도 다 취향이라는게 있다구!)
최근 나는 심미안 또한 계속 트레이닝하고 있다. 마음에 드는 앱들을 골라 세부적으로 분석하듯 들여다보고, Spotted in Prod, Muzli, Cosmos, Pinterest 등을 오가며 시각적으로 인상 깊은 세상의 온갖 것들을 저장한다. 연차가 쌓이면서 한동안 논리와 테크니컬 스킬, 효율에 더 집중해왔던 탓에 그 과정에서 감각의 영역은 자연스럽게 뒤로 밀려났던 것 같다. 그러나 취향은 방치하는 순간 빠르게 무뎌지는 법. 의식적으로, 다시 감각을 깨우는 쪽으로 방향을 트는 중이다. 이렇게 다듬어진 감각은 생각보다 다양한 순간에 개입한다. 디자인과 AI 작업에서의 의사결정은 물론, 쇼핑이나 레스토랑 선택, 여행 계획처럼 일상의 크고 작은 선택들까지. 결국 취향은 ‘선택의 방식’을 만든다.
기술적인 성장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배제하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결정하는 일은 여전히 취향의 영역에 속해 있다. 그래서 디자이너에게 취향은 부가적인 요소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단련해야 하는 핵심 감각에 가깝다고 느낀다.
얼마 전 어머니가 미국에서 방문하셔서 <일본 광고 카피 도감>이라는 책을 선물해 주셨다. 그중 특히 인상 깊었던 한 페이지를 공유해본다.
好きすぎる”は、才能。 “너무 좋아”는 재능입니다.
자는 게 아까울 정도로 숱한 이야기에 흥분했고,
캐릭터들의 대사에 몇 번이나 구원받았다.
좋아하는 것에는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어디든 쫓아다니며,
언제나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다닌다.
호기심은 멈추는 법이 없고 사랑하는 작품이 히트를 치든 말든
그 이유를 분석하지 않을 수 없다.
이야기가 시작되면 아침까지 이어진다.
이렇게 “좋아함”의 레벨이 지나쳐서
가끔 답답함을 느낀 적이 있었나요?
그건 어렸을 때부터 콘텐츠로 자라온 당신의
“너무너무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재능 때문입니다.
“好きすぎる”=専門性なのですから。
“너무 좋아”는 곧 전문성이니까요.
애니메이션, 만화, 소설, 영화, 드라마, 잡지, 게임…
20여 년의 인생을 걸쳐 「이 이야기는 이런 캐릭터가 나와야
재미있어진다.」 「그 애니메이션은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갔더라면
히트했을 것이다.」 「영상 사이트에서 발견한 이 크리에이터,
지금은 무명이지만 머지않아 대단한 작품을 만들 것이
틀림없다!」라는 말을 거듭해온 시간은 당신의 소중한 재산입니다.
그러니 가끔 ‘특이하네’라는 말을 듣는 당신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는 겁니다.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무엇이든
“너무 좋아”를 주저 없이 해방시킬 수 있는 곳이
KADOKAWA입니다.
당신의 “좋아함”을 해방합시다.
가도카와 · 신입 사원 모집 공고